2018. 08. 27. 오후 12시 50분.
한 사람의, 한 생명의, 할아버지의 마지막 시간.
장례식을 끝마치고, 이렇게 혼잣말이라도 두런두런 꺼내어 놓지 않으면 고인 빗물같은 마음이 영원할 것 같다.
그때의 난, 아침에 일어나서 명상을 하고 '담배 하나 필까.'하는 생각으로 집에서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혹시나 담배를 태우는 그 순간에 아버지가 돌아오실까봐 걱정되는 마음에서였다.
할아버지가 계신 병원에 계시다는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마음 놓고 한 대 태울 생각을 하며 담배와 같이 할 커피를 내렸다.
그리고 왜인지, 혹시 담배를 태우는 순간 오실까 하는 생각에 다시 전화를 걸어 학교가기 전에 병원에 가겠다는 이야기를 하고 여유롭게 담배를 태웠다.
담배를 다 태우고, 남은 필터와 커피를 버리고 담배 냄새를 없애기 위해 간단하게 샤워를 하고 옷을 입고 병원에 갔다.
가는 중에 아버지에게 전화가 걸려와 일회용 칫솔을 사오라 하셨고, 나는 느긋하게 차를 주차시키고 여행용 치약 칫솔 세트를 사서 갔다.
건물을 잘 몰라서 잠깐 헤매다가 엘레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는데, 다급하게 이모가 얼른 오라는 애달픈 목소리로 나를 재촉했다.
나는 당황스러움이 먼저 들고 뭔데 이렇게 재촉하나 약간 짜증도 났었던 것 같다.
급하게 신발을 갈아신고 갔을 때, '곧 돌아가신다. 그러니까 얼른 와서 할아버지 귀에 말을 해라.'라는 말을 처음 들었다.
상황파악이 잘 안 됐었다. 나는 엉겹결에 할아버지 귓가에 작은 목소리로 '할아버지, 사랑해요'를 몇 번쯤 말했던 것 같다.
달리 할 수 있는 말이 생각이 안 났다.
나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었을까. 지금 당장 그 순간으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여전할 것 같다는 슬픈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제서야 난 할아버지를 제대로 볼 수 있었다. 그토록 여위고 가는 할아버지는 뵌 적이 없었던 것 같다.
형과 함께 며칠 전에 할아버지 병문안을 갔었을 때가 갑자기 생각난다. 그때는 그래도 몇마디 나눌 수 있었는데, 얼른 가라는 할아버지 말씀에
정말 얼른 나와버렸다. 20분 남짓의 시간이었던 것 같다. 평소에도 강경하셨던 할아버지라, 아픈 모습을 보여주기 싫으셨던 것 같아서
정말 금방 나왔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1분이라도 조금만 더 있을 걸 한다.
아무튼, 나는 주변의 성화에 떠밀려 할아버지께 말을 건네고, 왜인지 차마 가까이 할 수 없어서 몇 걸음 떨어져 상황을 보았다.
다들 다급하게 할아버지에게 그동안 못했던 말들을, 부르짖었다.
칙칙한 회색의 우둘투둘한 벽면을 눈을 감고 손으로 훑는 느낌이었다.
내가 더 있으면, 하고싶으신 말들을 못 하실 것 같아서 잠깐 나와서는 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곧 돌아가실 것 같으니 오라고. 잠결에 깬 형은 알았다며 전화를 끊었다. 이때가 12시 52분이었고 52초동안 통화를 했다.
전화를 끊고 다시 돌아오니 돌아가게셨다. 그 순간 잠깐, 내 시간이 멈췄다.
사망 시각이 12시 50분으로 되어있지만, 52분 이었던 것 같다.
할아버지께서 그 강경하신 마음으로 마지막 순간은 나에게 보여주기 싫으셔서 안 보여주셨다는 생각이 든다.
돌아가신 모습을 한참을 바라보았다.
식어가는 몸을 차마 만져볼 수 없었다.
'그럼 저건 더이상 할아버지가 아닌걸까?'
할아버지의 본질이 무엇이었는지, 한참을 찾았다.
답을 찾지 못한 채로 뒤돌아야했다. 들숨과 날숨이 없는 그 모습은 너무나 낯설어 헛구역질이 나왔다.
'혼'이 있다면, 그 혼은 '생동감'이겠다는 생각이 든다. "움직임" 그것이 없으니 너무나 이질적이었다.
그와 함께 시간이 멈춘 나의 주변으로 모든 것들이 지금까지 빠르게 흘러갔다. 나만 그 순간에 멈추어 있고.
난 아직 어리다는 것이 느껴졌다. 어른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했다. 누군가는 아직도 못다한 말을 하고, 누군가는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얼어있는 내 옆으로 다가와 "인생은 이런 거야. 그러니까 하느님을 믿고 천국 가는 게 인생의 목표인거야."라는 식으로 속삭이던 목사.
친척이지만, 그 순간은 목사였다. 한 사람의 마지막 순간을 이용해 전도를 하는. 그 순간 꼭 그래야 했을까, 그러고 싶었을까.
나는 그때부터 그의 목소리는 무시한 채로 삼촌의 말씀을 따라 움직였다.
그 말을 따라 안장신청서를 작성하고, 교수님께 연락을 하고, 집에 들러 강아지를 맡기고 등등...
그 후 장례식이 끝날 때까지 난 무슨 일이든 잡히는 대로 했다. 주어진 일이 없으면 신발정리를 하고, 돌아다니고, 세수를 하고...
어떤 것이라도 안하면 안 될 것 같았다. 다른 이들이 충분히 슬퍼할 수 있는 시간을 빼앗을 수 없었다.
할아버지의 마지막, 수의를 입으시고 관에 들어간 후 차디찬 냉장고에 들어가시기 전 모습을 보았다.
하지만 여전히 할아버지는 찾을 수 없었다. 나는 그동안 무엇을 할아버지라 부르며 대화를 하고 누군가를 지칭하였는가.
無狀이라는 말이 너무나 와닿는 순간이었다.
관에 들어가실 때, 장의사 분들이 할아버지의 팔을 접는 것을 어렴풋 보았다. 그토록 딱딱한 것을 난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묵직한 관을 들고 걸었다.
죽은 자를 뒤로하고 산 자들을 맞이하기에 바빴다.
모든 것이 할아버지를 위한 것이 아닌, 남은 우리들을 위해 치뤄지는 것들 같았다.
사람의 마지막은 그런 것인가보다.
3일 내내, 그리고 지금도 비가 온다. 그게 나았다.
할아버지께서 기독교 방식으로 장례를 치르고자 하셨다.
기독교 사람들은 할아버지께서 병중에 계실 때, 각서를 받아 병실 서랍에 넣어두었다. 우리 가족이 없을 때.
관에 들어가셔서 무언가를 덮을 때, 굳이 옆에서 기독교는 그런 방식 아니라며 핀잔을 주는 그 모습이 가엾었다.
장례식에서는, 느낀 바를 이야기하자면, 사람은 혼자 태어나서 혼자 가는 것이라는 말이 유행처럼 돌지만,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태어날 때도, 죽을 때도, 많은 사람이 있구나.
한 생명이 다하여 없어진다하여 홀로 끝이 아니구나.
누군가의 한 삶이 끝나도 시간은 잔인할만큼 세차게 밀려오는구나.
삼일이 그 시간에 멈추어 있다가 다시금 흐르기 시작한다.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이 이렇게 나뉘는구나.
나는 어떻게 살 수 있을까?
나는 어떤 마지막을 맞이할 수 있을까.
죽음을 알기 위해 삶을 알아야한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다.
난 무슨 말을 해야했을까.
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At say'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술 (0) | 2018.02.18 |
---|---|
2017.09.21 (0) | 2017.09.21 |
2017.09.15 (0) | 2017.09.16 |
2017.09.14 (0) | 2017.09.15 |